南道 정자기행(6)- "조선 제일의 황룡이라” 장성 요월정(邀月亭)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황룡리에 있는 정각과 주변의 배롱나무와 노송 숲.
뉴스일자: 2010년05월22일 06시23분


전남 장성군 황룡리 원황룡 마을입구에는(황룡면 황룡리 171번지) 황룡정이란 팔각정자가 있다.

그 뒤로 돌계단이 있고 숲길을 따라 잠시 오르면 요월정(邀月亭)이란 정각이  송림과 100년 수명의 60여 그루 꽃이 오랫동안 피어 있어서 백일홍나무라고도 하는 배롱나무에 둘러져 자리하고 있었다. 매미소리만 안들릴 뿐 5월 하순에 여름이다. 벌써 그늘이 그리운...

요월정에 앞에서 바라보니  황룡강이 굽이쳐 흐르고   강 건너로는 옥녀봉과 대하고  탁트인 들판이 보인다. 이곳이 전남도 기념물 제 70호 (1985.2.25)로 지정된 요월정(邀月亭)이다  정.누정은 보통 조망이 트인 높은 곳이나 천석이 수려한 물가 등 경관이 뛰어난 곳에 세워졌다.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고 즐기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이를 유흥상경(遊興想景)하면서 자연의 순리를 터득하며 후진에 대한 강학과 유생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던 교유의 장소이기도 한 것이다. 요월정이 딱 그런 필요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곳은 조선 명조대에 공조좌랑(工曹佐郞 – 정6품)을 지낸 광산인 요월정(邀月亭) 김경우(金景遇 1517~1559)가 말년에 낙양하여 산수를 벗하며 음풍농월하기 위해  절벽위에 1565년에 건축했다.

이곳은 조선중기의 문이요 남원(南原) 출신 제호(濟湖) 양경우(梁慶遇 : 1568 ~ ?)가  두류산(頭流山 지리산(智異山)의 별칭) 기행록(紀行錄)에 "무오년(1618, 광해군10) 늦봄 초에 나는 오산현(鰲山縣 장성(長城)의 별호)에 있었다. 현주(玄洲) 조찬한(趙纘韓)이 토포사(討捕使)로 호남과 영남의 제도(諸道)를 안찰하고 순행(巡行)이 우리 현에 이르렀다. 이어서 고을 사람 상사(上舍) 김우급(金友伋)계정(溪亭)으로 가서 꽃을 감상하며 시를 짓고 남중(南中) 산수의 뛰어남을 서로 토론하였다."고 제호집 제11권에 적고 있어 계정(溪亭)이라고 했다.

이곳은 또 요월대(邀月臺)라고도 부르고 있다. 퇴락 후 1811년 요월정 8대손 황주(黃洲)  김경찬(金京燦 1796~1879)이 1차 중건하였으나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이  선대 고향인 장성군 황룡면 소곡리(小谷里) 하남(河南)·탁곡(卓谷) 일대에서 살면서 "요월대는 비록 빈터 되었지만 / 옥녀봉은 여전히 아름답네 邀月臺雖墟 玉女峯猶姹"라고 시를 읊었듯이 다시 훼철되었다.

이후 일제감점기 때인 1925년 후손 김계두(金啓斗 1867-1943)가 재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한다.


정각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2개의 방과 동쪽의 마루로 이어져 있어 평면 구조로 보면 정보다는 당()에 가깝다


월봉서원에서 장성 쪽으로 3-4Km 가면 있다.  요월(邀月)은 ‘달을 맞는다.’는 뜻이다. 맑은 황룡강변에서 달을 맞는다는 의미의 이 정자는  상당히 높은 곳에 지어진 정자이다


광주가 낳은 철인이요 문인이었던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1527~1572)이 올라 읊은 요월정의 운(邀月亭韻)에서 정자를 지은 취지가 드러나 있다.

그대의 재기가 수레를 탈 만한데 / 강호(江湖)에 방랑한 나머지 자취를 감추었네.
술을 실은 배 끄니 풍색이 조용하고 / 꽃을 심고 지팡이 잡으니 달빛도 밝네.
夫君才氣合乘車 遁跡江湖放浪餘 載酒引船風色嬾 花扶杖月華虛

옛 학문에 마음 두니 오직 마음이고 / 새로운 시에 손을 대니 다시 문채로워.
구천에서 우로(雨露)가 응당 내려오리니 / 직장의 위망이 주려를 누르리라.
經心舊學惟心也 脫手新詩更賁如 雨露九天應下漏 直長威望壓周廬

시에서 주려(周廬)는 궁궐을 호위하기 위하여 설치한 군막(軍幕)을 말한다.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된 나주출신 조선 중기의 문신 
광주목사(光州牧使) 승지(承旨) 등을 지낸  귀래당(歸來堂) 임붕(林鵬)의 증손이자,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풍암(楓巖) 임복(林復)의 손자이며, 임협(林悏)의 아들인 몽촌(夢村) 임타(林㙐 1593 선조 26∼1664 현종 5)도 어느날 이곳에 들려 감회를 남긴다.

물은 고요하고 물고기가 물결을 부는데/달은 빍아서 사람이 정자에 기대어 섰도다.
맑은 술잔에 이야기는 끝나지 안는데/ 도리어 이별의 슬픔 생길까 겁나네.

정자에 오르니  경치가 한눈에 들어 온다. 배롱나무와 소나무 아래에 황룡강이 흐르고  황룡 들녘이 잘 퍼져 있다. 그러나 강이라고 하나 지금은 소하천에 불과하다. 유수문화(流水文化)를 느끼기 가장 적절한 공간이다.

한 곳에 있는 안내판에는 ‘요월정은 조선의 명종 때 공조좌랑을 지낸 김경우가 1550년대에 산수와 벗하며 풍류를 즐기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서 당대의 명사인 하서 김인후와 고봉 기대승, 송천 양응정이 시를 읊고 놀았다’고 적혀 있다. 

그중에 시문에 능하여 선조 때 8문장의 한사람으로 뽑혔던  이곳에서 멀지 않는 곳에 유유자적했던 조선중기의 문인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 1519 중종 14 ~?)이 낮에부터 술을 마셨다고 하서 김인후와 같이 어울리며 차운하며(次金河西麟厚 韻) 실토한다.

낙조는 일천 겹으로 만 듯 / 남은 서리에도 만 길이나 푸르러
여기 와서 좋은 경치 말로써 주고 받으니/만나고 헤어짐을 흐르는 부평초(浮萍草)에 맡기네.
落照千重練  餘霜萬칅靑 爲來酬勝槪 離合付流萍

선인(先人)의 수레를 한스럽게 바라보며/소은정을 거닐어 보네.
술독에 맑은 술이 아직도 남았는데/산과 강에는 저녁 연기이네
悵望仙人駕 徘徊小隱亭 淸樽猶不盡 臼水暮煙生/松川先生遺集卷之一

이곳에서  김경우의 후손인 김경찬의 일화도 재미있는  스토리텔링 감으로 신선하게 다가 온다.

김경찬은 요월정 경치를 찬탄하여 ‘조선의 제일’ 라고 시를 썼단다. 그런데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문제가 되었다. 황룡의 경치가 조선의 제일이라면 임금이 사는 한양은 조선의 제2라는 것이냐는 시비가 붙었다.

김경찬은 한양에 끌려가서  심문을 당하자 ‘황룡은 조선의 제일이요 임금님이 계시는 한양은 천하의 제일이라.’는 뜻이었다고 답변하여 화를 면하였다 한다. 만약에 중국 명나라 조정에서 이를 알아서 김경찬을 다시 추국하였다면 김경찬이 명나라 수도는 무엇이라 답변하였을지 자못 궁금한 대목이다.

정자를 보니 요월정이라고 적힌 한문 현판이 두 개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김인후, 기대승, 양응정이 읊었다는 요월정 시는 찾아 볼 수 없다. 방 안에 있을 것 같아 문을 열어 보았으나 잠겨 있다. 

김경우는 고려 말기 절의신 두문동 72현(杜門洞 七十二賢)중에 한 사람이었던 수산공 김자진(金子進)의 손자이며 나주 공산면에 살고 있던 부친 충손(衷孫)이 황룡리로 입향해 김경우를 낳았고 지금도 김자진의 3형제를 모시는 동화면 면소재지 근처 동호리 백산마을 숭모사(崇慕祠) 에 모셔져 있다.

그는 당대 걸출한 인물들이 주변에 포진 요월정에서 많은 시간을 갖었다. 고봉집과 하서집에는 고봉과 하서가 읊은 요월정 시가  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았던 고봉 기대승(1527-1572)은 김경우보다 10살 아래이다. 고봉이 1558년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김경우와는 그가 과거 급제하기 이전에 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고봉이 정내에 현판에는 김경우 요월정에게 준 시(與金佐郞景愚邀月亭詩)가 있다.

지붕 위에 흐르는 햇살 굴러가는 수레 같아 / 강산에는 지금 구월의 가을빛이로다
쓸쓸한 낙엽 빗속에 나부끼고 / 첩첩의 먼 봉우리 허공에 솟았구나
屋角流光似轉車 江山今見九秋餘 蕭蕭落木空飄雨 疊疊遙岑欲挿虛

소나무 아래에 술병 차니 정이 무궁하고 / 물가에 손님 맞으니 흥이 어떠한가
소광한 몸 스스로 한가로움 좋아해서이니 / 밝은 때에 벼슬이 싫어서만은 아니로세
松□□壺情不盡 水邊邀客興何如 疎狂自有偸閑僻 未必明時厭直廬

우리는 간혹 고풍스런 고가나 정자에 가면 연비어약(鳶飛魚躍)이라는 단어를 대할 때가 있다. 그것은 우주에 유행(流行)하는 대자연의 이치를 가리킨다. 시경 한록(旱麓)에 “솔개는 날아 하늘에 이르는데, 물고기는 못에서 뛰논다.鳶飛戾天, 魚躍于淵.”라고 하였는데, 중용장구에서 이를 두고 “아래위에 이치가 밝게 드러남을 말한 것이다.”라고 했다. 순리문화의 기본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월정에서 그것을 느끼게 하고 있다.

이곳에서 멀지 않는 곳의 전라도를 대표하는 조선 18현의 한사람이었다 철인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 중종 5∼1560 명종 15). 이 요월정에 안들렸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그가 요월정에서 읊은 시에서  연비어약의 사상을 느낄 수 있었다.

밝은 달은 툇마루에 마주쳐 희고  / 가을빛은 눈에 서려 파랗군 그래
이 날 밤 정자에 이 경치 보니   /  한 세상의 부평(浮萍)이 가소롭구려. 
月色當軒白  秋光入眼靑  登臨此夜景 一世笑浮萍


1899년경 편찬된 『장성군읍지』〈奎 10782〉에 수록된 지도.

 
그런데  김경우는 1559년에 별세한다. 이 때 고봉은 김경우에 대한  만시 2수를 쓴다. 이 시는  고봉집에 남아 있다. 김 좌랑 경우에 대한 만사(挽金佐郞景愚) 2수에서도 요월정에서 지냈던 것을 기억해 낸다.

흰 장막 갠 모래 바라보는 속에 밝았는데 / 한 병 술로 그대는 나의 걸음 기다렸지
할미새 사는 곳의 묵은 풀 정을 참을 길 없으니 / 맑은 기쁨 저버리고 사생이 막혀 있네
白幔靑莎望裏明  一壺君爲佇吾行 鴒原宿草情難忍 孤負淸歡隔死生

요월정(邀月亭) 속에서 몇 번이나 취했던가 / 인간의 모든 일 부평에 부치노라
청산은 눈에 가득 가을 빛 차가운데 / 쓸쓸한 흰 달빛 밤중에 들어오네
邀月亭中幾醉醒  人間萬事付流萍 靑山滿目秋光冷 惆悵銀蟾入夜凉

여기에서 ‘영원(鴒原)의……없으니’는 고봉이  김경우의 무덤에 풀이 묵도록 가보지 못함을 탄식한 것이다. 영(鴒)은 할미새이다. 

이들은 우의(友誼)가 매우 두터운 친구 사이의 대명사로 사용하고 있는 진뢰(陳雷) 사이였다. 이는 후한 때의 진중(陳重)과 뇌의(雷義)는 우의가 두텁기로 유명해 이름의 첫자를 따 진뢰(陳雷)라 했다.  

뇌의가 무재과(茂才科)에 급제하여 그 자격을 진중에게 양보하였으나 자사(刺使)가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거짓으로 미친 체하여 벼슬을 받지 않으니, 고을 사람들이 그들을 두고 “아교와 옻칠이 굳다고 하나 뇌의와 진중만은 못하리.膠漆自謂堅 不如雷與陳”하며  매우 두터운 친구 사이라는 의미로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後漢書 卷81 雷義列傳

송(宋) 장재(張載))는 “책은 이 마음을 지켜 준다. 잠시라도 그것을 놓으면 그만큼 덕성(德性)이 풀어진다. 책을 읽으면 마음이 항상 있고, 책을 읽지 않으면 의리(義理)를 보아도 끝내 보이지 않는다.장자전서(張子全書)"고 했다.

요월정에 올랐던 인물들은 속깊은 지식인들이었다. 이곳을 방문한 것도  그들의 학덕을 찾는 이유가 되고 있다

甚愛必甚費요, 甚譽必甚毁라, 甚喜必甚憂요, 甚贓必甚亡이니라.
즉 "심히 사랑하면 반드시 심히 허비하게 되고, 심히 기리면(칭찬하면) 반드시 심히 헐게 되고, 심히 기뻐하면 반드시 심히 근심하게 된다"고 했다. 너무 서양문화와 억지문화에 치우치면 이에따른 폐단의 댓가를 반드시 받게 된다.

누정의 선비문화와 같은 무형의 자원 즉 문화 콘텐츠를 가지고 활용방안을 찾는 것이 중요 하다고 할 수 있다. 정자문화, 유수문화의 아이콘이 천시해서는 더욱 안되리라 믿는다.

이 시대는 이성이 욕망으로,  집단이 개별로, 보편이 특수로, 감성이 육체로, 본체가 현상으로 변해 버렸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적 현상의 질서를 인간의 질서로 민들기 원했다. 그것이 순리적 삶이다.
 
그의 반하는 억지문화는 당장은 눈에 보이는 효과가 있는 듯 하지만 더 잔인한 현상이나 대상과 끝임없이 싸워 이겼을 때 가능하다. 지금의 별 희안한 병이나 인면수심의 사건들이 그러한 결과물이다.

“소(牛)에게는 금(金)으로 만든 고삐라 해도 씌우면 값어치가 거의 없어진다"했다. 억지로 꾸미는 것은 별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양 무제(梁武帝)는 사람을 보내어 그 당시 은사(隱士)였던 도홍경(陶弘景)을 불렀더니, 홍경은 소 2마리를 그려 올렸는데 1마리는 금으로 만든 고삐를 쓰고 곡식을 배불리 먹고 있었으며, 1마리는 고삐 없이 파란 풀 위에 한가로이 누워 있었다. 무제는 “이 사람의 뜻이 이와 같으니 데려올 수 있겠는가?” 하였다 한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가르치는 데 있어서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가르쳐 주지 않는 것도 또한 가르치는 것이다.敎亦多術矣 予不屑之敎誨也者 是亦敎誨之而已矣” 하였다. 孟子 告子下 정자가 그런 곳이다.

참고자료=한정록 제12권. 한국고전 종합 DB. 고봉속집 제1권 장성문화원
오인교 기자/ nox91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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